2005년 04월 23일
17. 깨어남
'오리'는 '알'에서 깨어나는 생물이다-
알 속의 오리는 아주 작고 연약한 생물이다. 단 한 번도 바깥의 위협을 받아본 적 없고 스스로 위협해본 적도 없는 순수하고 작은 생물. 그런 작은 생물에게도 반드시 한번의 시련이 닥친다. 스스로 자신을 지금껏 보호해준 알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그것이다. 이 시련은 오리가 한 마리의 진짜 '오리'로 살아가기 위한 단 한번의 기회이기도 하다. 오리는 '오리'가 되기 위해 알을 공격한다. 누구 하나 상처주지 못할 것 같은 자그마한 부리로 콕, 콕, 끈기있게 알을 쪼아댄다. 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조용한 곳에서 귀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만큼 작은 '콕, 콕'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 그 증거다.
이 소리에는 무슨 마력이 있는 것인지 때때로 마음여린 이들을 끌어들인다. 그들은 알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작은 새를 가엾게 여겨 손톱이나 핀 끝으로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알 끝을 벌려 가여운 새의 아군이 되고자 한다. 하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쉽사리 알을 빠져나온 오리는 금세 힘을 잃고 파들파들 떨다가 죽고 만다. 그들은 오리의 시체를 보며 운다.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저 가여운 새를 도와주었더라면. 하지만 오리를 죽인 것은 단단한 알껍질이 아니라 울고 있는 마음여린 이들이다.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알껍질을 깨지 못한 오리는 '오리'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까닭이다. 마음여린 이들은 살아있는 오리를 가여운 새의 시체로 만드는 강력한 적군이다.
그런 의미에서 보면, 알 속에서 콕, 콕 울리는 작은 소리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히죽이 웃고만 있는 이 사내는 알 속의 오리에게 있어 진정한 아군일지 모른다.
- !
알이 깨졌다. 알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눈을 채 뜨지 못한 '오리'는 머리와 한쪽 날개만 드러낸 채 다른 쪽 날개와 다리를 알에서 마저 꺼내기 위해 한참을 바둥거렸다. 얼마 후 오리는 알껍질을 저만치 벗어둔 채 만족스럽게 꽉 하고 울고, 그리고 지친 듯 그 자리에 엎어졌다. 아직 축축하게 젖은 깃털이 이리저리 엉켜 있는 오리의 작은 몸은 마치 샛노란 털뭉치가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. 꼼틀꼼틀 숨쉬고 있는 샛노랗고 작은 털뭉치.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사내는 잠들어버린 털뭉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.
- 오리는 알에서 깨어나서 가장 처음 본 것을 제 엄마로 생각한다지?
사내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히죽 웃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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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작은 역시 탄생과 관련된 주제가 좋겠다 싶어 선택된 '깨어남'. 단어에서 나오는 느낌은 '각성'에 가깝습니다만, 제가 연상한 것은 '알에서 깨어나다'라는 문장이었기 때문에 갖다붙여놓고 우기고 있습니다. :D
이후는 33번 '감정'과 연결됩니다.
# by | 2005/04/23 01:12 | 취향 | 트랙백(1) | 덧글(0)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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